▲라바날 델 카미노수도원 입구
JH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 더듬더듬 길을 따라 수도원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 섰다. 굳게 닫힌 문에는 '두 시부터 개방, 자전거는 다섯 시부터' 라는 안내문이 걸려있다.
벌써 도착한 순례자들은 가방으로 대기줄을 만들고 벤치에 앉아 있거나 문 맞은편의 아름드리 나무에 기댄 채 빵을 꺼내 식사를 한다. 인사를 하고 분위기를 살폈다.
곧 비가 올 것 같아 처마 밑에 가방을 기대고 밥이라도 먹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문 밖에 내걸린 메뉴들을 보며 몇 번을 고심하다 에라 모르겠다, 숙소를 겸하는 식당 하나에 들어갔다.
식사시간인 한 시까지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시간이 되자 '이리로 와요'하는 목소리에 '식당(Comedor)'이라는 이름이 붙은 별실 공간으로 향했다. 고운 천이 깔린 테이블과 반짝이는 집기들, 눈앞에 보이는 창으로 작은 정원이 보였다. 생각보다 꽤 괜찮은데? 자리에 앉아 메뉴를 뒤적거리며 즐거운 상상에 빠져들 즈음이었다.
"안녕! 너 여기서 밥 먹는구나? 괜찮으면 합석해도 되지?"
"네? 네…." 어젯밤 아스토르가의 숙소 테라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마우로와 마리사였다. 이탈리아에서 온 그들도 오늘 이곳에서 하루를 지낼 생각이란다. 지난 순례 때 하루 최소 10시간, 50km를 매일 내달리다 결국 아스토르가에서 다리가 부러져 순례를 중단했던 마우로. 그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강한 자부심으로 시작한 순례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어제, 중단했던 순례를 다시 잇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 무리하지 않을 거야.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걸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
"저는 혼자 걷다가도 앞질러가는 사람이 생기면 금세 조바심이 나고 발이 급해져서 걷는 것이 괴로워져요."
"바로 그거야! 남이 나를 앞지르면 왠지 빨리 걸어야 할 것 같단 생각에 따라서 속도를 내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조급해지지. 그래서 잘 걷는 마음이 순식간에 평정을 잃어버려. 그렇지만 이곳에 달리기를 하러 온 건 아니잖아? 기록을 세우기 위해 온 것도 아닌데 말야."그 동안 알게 모르게 나를 괴롭히던 어떤 것이 어슴푸레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이십여 년 내내 그런 것처럼 길 위의 23일도 다르지 않았다. 같이 걷게 된 사람들과도 계속 알 수 없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씨름에 지쳐 하루를 멈추기까지 하며 헤어지려 했고,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도 무언의 각을 세운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무언가에 가위눌리듯 한 느낌 속에서 그것이 무엇인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저 사회적 압력이라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하고 말았다. 떠나면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만 킬로미터를 날아오면 그 버거운 무게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며 완전하게 자유로워 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오히려 내 온 몸에 밴 습관의 테두리, 그 경계를 더욱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조바심의 각은 세상의 것인 동시에 바로 내 것이었다. '사기꾼, 못 믿을 것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할 거야,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할 거야'…. 적대감의 날은 한국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 깊게 뿌리내린 것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옆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주문을 하고, 접시를 받은 후 성호를 정성껏 긋는 순례자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열심히 걷고 지금 이 음식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음으로부터 번져오는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래, 적어도 앞으로 10여 일, 모든 '그래야 함'같은 것들은 다 던져버리고, 그저 나와,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함께' 하는 것을 연습하자. 할 수 있을 거야.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몸 씻으며 아연실색하다식사를 마쳤을 때에는 두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나는 양껏 마신 비노로 대낮부터 살짝 취기에 빠져 숙소로 돌아왔다. 활짝 열린 대문 한 쪽에 그대로 기대어 있는 가방을 들고 입실했다.
"피정 집은 어떻게 들어가요?", 질문을 하자 주위 분위기가 어색하다. "이따가 수도원의 신부님과 얘기를 해 보는 게 좋겠어요." 짐을 어디에 풀어야 할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것을 마우로가 선뜻 나서 도와줘 우선 이곳에 침대를 얻기로 했다.
그런데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몸을 씻으며 아연실색했다. 온 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있는 것이었다. 침대벌레들의 자국이었다. 손으로 짚어가며 하나 둘 세어보자 53이 되어서야 끝났다. 샤워를 마치고 오스피탈레로를 찾아가 "침대벌레 약 있으세요?", "피정 집은 대체 어떻게 들어가요?"라고 몇 번을 귀찮게 굴며 약을 얻어 바르고 침낭을 빨랫줄에 널었다. 비마저 내린다. 문득 레온에서 만났던 지영씨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온 몸을 할퀴고 지나갔던 침대벌레 자국이 생각났다.
걸을 땐 알지 못했던 가려움이 점점 심해진다. 옴이라도 걸린 양 팔다리를 벅벅 긁어대며 빗방울이 돋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침대벌레의 습격과 반갑지 못한 자신에 대한 직면, 게다가 산에 오르기엔 편치 않은 날씨까지, 이 모든 것은 '내일부터는 이곳에서 푹 쉬었다가 가렴'하시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빈대벼룩이 날 잡아먹겠어, 어쩌겠어? 좀 간지러울 뿐이지. 옷이며 침낭은 빨면 그만일 테고. 스페인의 태양 아래에선 그 애들도 못 견딜 테야.' 믿음의 힘인지 알코올의 힘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하하하, 웃고 말았다. 이 정도면 순조로운 적응이다.
순례 초반 아조프라 길에 헤어졌던 워싱턴D. C.에서 온 밀다가 비를 쫄딱 맞은 채로 숙소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얼마 만인지! 그녀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고?""응, 허리가 많이 아프셔서…."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어둡다.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 너를 보니까 참 반갑다" 며 웃어주는 그녀가 고맙고, 참 반가웠다.
저녁 일곱 시, 숙소 맞은편의 작은 성당에서 '저녁 기도(Vespers)'가 열린다. "저 한국어로 성서 읽어도 돼요?" 하고 미리 양해를 구해 맨 앞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긴 수도복을 입은 다섯 명의 수사와 실내를 빼곡하게 채운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응송하는 '성음악(Gregorian Chant)' 기도가 울려 퍼지는 작은 성당에서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성서가 낭독되었다.
곧이어 나는 독서대로 올라가 손에 쥔 한국어 성서를 펼쳐들고,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한 절씩 읽어나갔다. 하나이며 보편된 교회,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한 몸을 이루는 우리들…. 신앙의 신비란, 이런 것일지 몰라.
성당을 나오자 사람들 사이에서 수사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피정 집에 들어가도 돼요?""네, 됩니다. 내일 아침 기도시간 후 성당 앞에서 만납시다. 가방 가지고 오세요." 시원한 대답을 받고 상쾌한 기분이 되어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오늘까지 봉사를 마치고 돌아가신다는 오스피탈레로 할아버지는 나를 향해 웃으며 이야기하신다.
"벌레물린 데는 괜찮아요? 난 깜짝 놀랐어요! 영어로 성서를 읽고 나서 바로 당신 나라의 말로 성서를 읽는데 마치 그 구절들이 하나하나 연결되는 느낌이었지."괜히 쑥스러워 무심결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좁은 계단을 따라 방으로 올라가는 길에 마우로를 만났다.
"우리 방금 파스타 해서 나눠먹었는데, 안 그래도 너 찾았는데 없더라. 밥은 먹었고?""기도시간에 다녀왔어요. 밥은 이제부터 해 먹어야죠. 고마워요!" 그날 밤에는 숙소에 남아있던 파스타 면에 라면스프를 넣고 끓여먹었다. 같은 식탁에서 베이컨과 달걀프라이를 먹던 브리기테 아주머니에게 "한 번 드셔보실래요? 꽤 매운데…" 하며 권했더니 "정말 맵구나!"하시며 손으로 내내 부채질을 한다.
531km를 지나 여기까지 왔다해가 기운다. 23일, 531km를 지나 여기까지 왔다. 오늘의 모든 것들이 감사할 뿐이다. 아니, 지난 순례의 나날들이, 그리고 나의 부족하기만 한 모든 날들마저도 감사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은 기도를 읊조리고, 꿈같은 단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2007년 7월 16일 월요일부터 2007년 7월 19일 목요일까지,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