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거주춤 자세 보니, '오늘이 고비겠구나'

[국토대장정 ⑥] 8월 30일, 태풍 덴빈이 따라오다

등록 2012.08.30 22:07수정 2012.08.30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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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덴빈이 따라와 엄청난 폭우를 쏟아부었다. ⓒ 최규석


태풍 덴빈은 남부지방에 엄청난 비만 퍼부어댄 것만 아니라 국토대장정을 나선 채인석 화성 시장의 발길도 붙잡았다. 오늘(30일), 채 시장은 어제 걷기를 멈췄던 영산강 부근(광주광역시 동림동)부터 장성군청을 거쳐 30km를 걸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거침없이 퍼부어대는 비 때문에 23km 남짓 걸은 뒤 걸음을 멈춰야했다. 점심식사 이후 걸을 예정인 길이 침수피해를 입어 일부가 내려앉고, 오늘 밤에 묵을 마을회관이 침수 직전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장성군와 정읍시 일대가 태풍 덴빈의 영향으로 침수피해를 입고 있다는 소식이 시시각각 날아들어 와 채 시장은 이런 상황에서 국토대장정을 이어가는 건 너무 이기적이라고 판단, 걸음을 멈추기로 했다.

오전 5시 30분경에 출발, 오전 10시 30분까지 채 시장이 걸은 거리는 23km. 일정을 중단했다고는 하나, 충분히 걸을 만큼 걸은 것도 사실이다.

어젯밤, 채 시장이 정한 숙소는 장성군 장성읍 수산리 마을회관. 원래 예정했던 숙박지는 아니었다. 장성군 상오리 마을회관에서 묵을 예정이었으나, 태풍 볼라벤 때문에 침수피해를 입었다고 해 급히 숙박지를 변경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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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 장성읍 수산리 마을회관 ⓒ 유혜준


아담한 단층 건물인 수산리 마을회관으로 들어서면서 채 시장이 국토대장정을 겸해서 전국 마을회관 순례까지 더불어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덕분에 마을회관 겸 경로당 구경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할머니방과 할아버지방이 나뉘어 있고, 주방시설과 화장실 시설을 갖춘 시설, 마을회관 겸 경로당. 다른 나라에도 이런 괜찮은 시설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수산리 마을회관은 화장실이 딱 하나였다. 그 화장실을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사용해야 하는 상황. 이부자리는 없었다. 침낭을 펼쳐놓고 자는 궁색한 잠이지만, 채 시장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잠자리가 아니라 탱크 지나가는 소리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소음들. 바로 다른 일행의 코코는 소리.

채 시장은 어젯밤, 세상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음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그럴 줄 알았다. 열댓 명은 족히 되는 인원들이 마을회관의 방을 차지한 채 난민처럼 널브러져 자고 있으니 코고는 소리도 다양했던 것. 얼핏 잠이 들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그리고 겨우 그 소리가 진정되었다고 여길 즈음 이번에는 다른 고음으로 들려오는 폭격소리. 그 소리가 일단 들리기 시작하면 잠자기는 이미 그른 것.


'마을회관 순례'까지 하게 된 대장정팀... 더 굵어진 빗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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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석


어젯밤,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채 시장의 국토대장정에 합류한 탓에 나는 작업을 하기 위해 장성읍의 한 모텔로 숙박지를 옮겼다. 덕분에 다른 때보다는 조용한 환경에서 작업을 했고 잠도 잘 수 있었지만 3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새벽 1시까지 작업을 했고, 피곤한데도 쉬이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벽 4시 23분,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4시 40분에 출발한다고 황호현 감독이 전화를 건 것이다. 나, 딱 한 시간만 더 자면 안 될까요?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건 황 감독도 마찬가지였을 터. 그냥 그 말을 꿀꺽 삼켰다.

국토대장정 6일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비, 어제부터 끈질기게 내리더니 오늘은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온몸이, 신발이 푹 젖는 비였다. 태풍 덴빈이 북상 중이라더니 우리를 따라온 것이다. 사이좋게 다정하게 같이 걸어주마. 덴빈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비가 내리는 새벽의 어둠은 평소보다 더 짙었다. 채 시장의 표정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알이 통통하게 튀어나온 종아리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 그 아래 운동화를 신은 발. 뒤꿈치에 잡힌 물집이 어젯밤 그를 몹시도 괴롭혔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어제 저녁, 식당에서 자리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이 고비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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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화성시의원 ⓒ 최규석


오늘은 김홍성 화성시의원도 국토대장정에 합류했다. 한 일주일, 빡세게 걸으면서 채 시장을 응원할 작정으로 찾아왔다는 그에게 일행은 번갈아가며 겁을 주었다. 채 시장을 따라잡으려다가 죽지, 하면서. 에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던 김 의원은 오늘 23km를 걸은 뒤, 힘들었다고 털어놓으면서도 "걸어서 좋았다"는 소감을 밝혔다.

오늘 채 시장과 함께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힘차게 걸음을 내딛은 사람은 15명. 비옷을 챙겨 입은 이들은 어둠과 함께 물이 흐르는 길 위로 나섰다. 채 시장은 오전 8시 15분에 장성군 남면사무소에서 김양수 장성시장을 만나 국토대장정의 의미를 설명하고 지지를 부탁할 예정이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굵어졌다. 도로 위에 물길이 생겼고, 사람들은 그 물길 속으로 서슴없이 발을 집어넣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5분도 채 걷기 전에 온몸이 젖었고, 신발이 젖었다. 땡볕 아래를 걷는 것보다는 빗속을 걷는 게 훨씬 낫다고 하지만, 폭우는 또 다르다. 온몸을 강한 빗줄기가 세차게 두드린다. 걸음을 옮기다가 잠시 비틀거리기도 한다. 비에 흥건히 젖은 길은 미끄럽기까지 하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았다.

오전 8시, 장성군 남면사무소에 모습을 드러낸 채 시장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옷을 입고, 모자를 써도 물은 몸을 타고 줄줄 흐른다. 오전 중에 그가 걸은 거리는 14.5km. 발이 아파도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정해진 일정을 제 시간에 맞춰 소화하려면 무한한 인내심이 필요한 법.

"너무 아파서 걷기 힘드네요"... 주민들 만나고 다시 밝아진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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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대장정 깃발에 사인을 하는 김양수 장성군수 ⓒ 최규석


김양수 장성군수는 정해진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시·군이든 자치단체장은 부지런한 새가 될 수밖에 없나 보다. 채 시장은 김 군수에게 국토대장정의 의미를 설명하고 지지를 부탁했다. 김 군수는 채 시장에게 격려와 지지를 약속했다. 쏟아지는 폭우를 헤치고 강행군을 하고 있는 채 시장 부탁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 군수는 채 시장이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채 시장 일행은 남면사무소의 회의실에서 직접 지은 밥과 국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온몸이 비에 젖은 그들 일행이 앉았다 일어난 의자에는 물기가 흥건하게 괴어 있었다.

오전 11시, 채 시장은 정읍시장과 면담약속을 잡았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오늘쯤 정읍에 도착해야 했지만, 태풍 볼라벤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 장성군청까지 걷고, 그곳에서 차를 타고 정읍시까지 이동해야 했다. 내일은 오늘 걸어서 도착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차를 타고 이동했다고 하면 그 구간을 차를 타고 갔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건 아니다. 다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이동했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걷는다.

태풍 덴빈은 정읍에 물 폭탄을 던졌다. 도로마다 물이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길 옆의 하천에는 흙탕물이 범람할 것처럼 세차게 흘러내려갔다. 저 물에 휩쓸리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물을 타고 산에서 흘러내린 돌들이 깔린 도로에 거침없이 물살이 흘렀다. 무슨 일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거친 흐름이었다.

정읍시에도 수재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디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다. 김생기 정읍시장이 수재현장을 둘러보러 나갔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채 시장과 면담은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김 시장은 일정을 서둘러 마치고 채 시장을 만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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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석 시장과 김생기 정읍시장 ⓒ 최규석


김 시장 역시 채 시장의 국토대장정을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서명록에 흔쾌히 서명했다. 김 시장을 만나지 못해 아쉬워하던 채 시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전 11시까지 23km를 걸었던 채 시장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오후 일정을 취소했다. 7~8km를 더 걸을 예정이었으나, 이후 걸어야 할 길이 침수피해를 입어 경로를 변경해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채 시장은 "오늘 일정은 이것으로 마치자"고 말했다.

"이틀 쉬고 걸으려니 발이 무척이나 아프네요. 발뒤꿈치가 너무 아파서 걷기 힘들 지경입니다."

채 시장은 양말을 벗어서 발뒤꿈치를 보여주었다. 굵은 하얀 실이 두 겹으로 꿰어져 있었다. 그냥 보기에는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그 아픔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오늘 밤에 묵을 예정이었던 마을회관이 침수피해를 입기 직전이라는 소식에 어제 묵었던 수산리 마을회관에서 다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지원차량을 타고 수산리 마을회관을 찾아가는 길,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잦아들기 시작했다. 덴빈이 북상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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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석 시장의 발 ⓒ 최규석


오후 3시 반, 채 시장은 발뒤꿈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들렀다가 장성역으로 향했다. 화성시 비봉면 주민들이 광주역과 광주버스터미널에서 "자연사박물관 화성 유치와 매향리 미군 사격장 생태공원 전액 국비 지원, 화성호 담수화 반대" 지지서명을 받기 위해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길에 채 시장을 만나려고 장성역에서 잠시 멈췄기 때문이다.

발뒤꿈치가 드러난 슬리퍼를 신은 채 시장은 비봉면 주민들을 만나더니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저리도 좋을까? 싶을 정도로 신이 났다.

"화성시민들이 자비를 들여서 자발적으로 서명운동을 벌여주는 게 너무 고맙습니다. 국토대장정의 의미를 시민들이 알아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힘이 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의도까지 끝까지 걸어가겠습니다."

채 시장은 그를 둘러싼 비봉면 주민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반창고를 붙인 채 시장의 발뒤꿈치를 보았다. 거참, 무지 아프겠다.
#채인석 #국토대장정 #자연사박물관 #화성시장 #덴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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