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국토대장정이야"... 볼멘소리 왜 나왔을까?

[국토대장정②] 8월 25일, 둘째 날 27km를 걷다

등록 2012.08.26 12:52수정 2012.08.26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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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대장정을 하는 채인석 화성시장 ⓒ 최규석


국토대장정 이틀째 날. 새벽 여명이 트기 전,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수탉이 목청을 돋우는 소리에 아, 여기가 해남의 한적한 농촌마을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자정이 임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거의 이루지 못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은 상상할 때는 정취가 물씬 풍기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게다가 화산면 마을회관은 시설은 좋지만, 국토대장정을 떠난 나그네들을 위한 이부자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임경환 화성시 공보담당관은 "풍찬노숙도 하는데 이부자리가 없다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냐"며 이부자리 타령을 늘어놓은 내 입을 막아 버렸다. 아니, 제가 독립운동을 하러 왔나요, 국토대장정을 하러 온 것일 뿐이지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는 거 아닌가.

하는 수 없지, 그냥 풍찬노숙 하는 기분으로 이 밤을 보내야지.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길 위로 나서면 누구라도 '노숙자' 신세가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오늘 국토대장정 출발 예정시간은 오전 5시. 채인석 화성시장은 오전 5시에 출발해서 오전 11시까지 빡세게 걸은 다음 오후 3시까지 다른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었다. 채 시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침형 인간이 분명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어대는 걸 보면. 나는 올빼미형 인간이지만, 동행취재를 하는 불평을 할 수 없는 입장이니 그의 일정을 따를 수밖에. 새벽 4시 20분 투덜거리면서 기상했다.

채 시장은 오전 11시까지 걸은 뒤, 박철환 해남군수를 만나 국토대장정의 의미와 배경을 설명하고 지지를 부탁하고, 해남군민들에게 국토대장정을 지지하는 서명을 받은 뒤 박지원 민주통합당 대표를 만날 계획이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도보를 중단한 지점에서 다시 최종 목적지인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 신성부락 마을회관까지 걸을 예정이었다. 그가 오늘 걸어야 하는 구간의 전체 거리는 2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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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민주통합당 대표와 채인석 화성시장 ⓒ 최규석


채 시장은 오늘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길 위를 누볐다. 어제 쏟아지는 폭우를 헤치면서 평균 시속 5.5km로 걸었던 채 시장은 오늘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던 것. 아니 오히려 걸음은 더 빨라졌다. 시속 6km 안팎의 속도로 걸었던 것 같다. 채 시장과 보폭을 맞춰서 함께 걸었던 이들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는 불만이 쏟아낼 정도로 채 시장은 빠르게 걸었다.

"이게 무슨 국토대장정이야. 말이 되냐고. 채 시장,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른 거야. 국토대장정 이름을 바꿔야 해. 경보대장정으로."


오전 5시 반에 출발해 오전 11시 이전에 채 시장을 포함한 일행이 목적지인 신성부락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예정했던 27km를 오전에 다 소화하고 말았던 것. 일정을 마친 다른 일행이 마을회관 안에 널브러져 있는 사이, 채 시장은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박철환 해남군수 면담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마을회관을 출발했던 것이다.

국토대장정 팀은 예정보다 30분 늦은 오전 5시 30분에 화산면 마을회관을 출발했다. 오늘 걷겠다고 나선 일행은 채 시장을 포함해 전부 10명. 새벽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보여행에 나서서 꼭두새벽에 길을 나서기는 처음이다. 오랜만에 잠자리가 바뀐 탓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건 채 시장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출발 전, 가벼운 체조로 몸을 푸는 채 시장의 표정이 어제와 달리 무거워 보인 것은 채 걷히지 않은 새벽 어스름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내린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걸은 탓에 푹 젖은 신발은 오늘도 여전히 축축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신발을 신는 순간, 양말이 푹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어제 오른발에 물집이 잡혔던데 이 상태로 걸으면 발이 부풀어 올라 물집이 더 커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걷다보니 발바닥에 느껴지는 통증의 강도가 점점 세지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걷다가 중간에 여름용 샌들 등산화로 갈아 신어야 했다. 바꿔 신은 신발이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이번에는 왼발에도 물집이 잡히는 것 같았다. 이맛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제 고작 이틀째인데 벌써부터 물집이 잡히면 완주하는데 문제가 생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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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 유혜준


채 시장은 어느 사이엔가 새벽 어스름을 뚫고 길게 이어진 길 위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오늘은 채 시장 뒤통수조차 구경하지 못한 채 빡세게 걷게 생겼군. 하지만 눈썹을 휘날리며 날듯이 걷는 그의 뒤를 따라잡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대는 그대의 페이스로, 나는 나의 페이스로 간다. 이게 이번 국토대장정의 내 모토. 채 시장 역시 무리하게 자신을 따라잡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걷다가 길 위에서 다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각자 다시 걸음을 재촉할 게 분명하다. 같이 걷는다고는 하나, 어차피 걷는다는 건 걷는 이 본인의 몫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채 시장은 자신의 몫을 힘차게 걸어 나가는 것이고, 나는 내 몫의 걷는 것이다.

하늘은 짙은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었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늘도 비가 내리려나,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은 맑은 빛으로 바뀌었다.

정말 빡세게 걸었다. 오전 8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식당까지 걸은 거리는 13km.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채 시장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화산면 마을회관을 출발할 때만 해도 어두워 보였던 채 시장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그의 곁에 그의 대장정을 응원하기 위해 해남까지 달려와 같이 걸어준 죽마고우들이 있었던 것.

8시 반 경, 아침식사를 마친 일행은 다시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나는 발바닥에 잡힌 물집을 대충 터뜨리고, 양말과 신발을 갈아 신은 뒤 신발끈을 조였다. 남은 거리는 14km. 세상에나, 벌써 걸어야 할 거리의 절반을 소화했다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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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 채인석 시장의 종아리. 꾹 누르면 공룡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한 번 눌러볼까? ⓒ 최규석


이번 국토대장정을 위해 체력을 다지고 다졌다는 채 시장의 큰소리는 허언이 아니었다. 누르면 화성시 전곡항에서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공룡 코리안케라톱스 화성엔시스의 알이 툭 튀어나올 것처럼 단단하면서 아주 큰 알통이 박힌 채 시장의 종아리를 보면 정말 잘 걷게 생겼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국토대장정을 위해 준비된 종아리라고 한다면 과장이 심한 걸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오전 10시가 넘어서면서 뙤약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참이었다. 그래도 간간이 바람이 불어 이마에 흐르기 시작하는 땀을 식혀주었다. 길 위에 펼쳐지는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푸른빛을 한껏 머금은 들판의 곡식과 채소, 야채 그리고 나무와 풀.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노라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채 시장은 어제 걸으면서 "이렇게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가 한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나 역시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물론 육체적인 고통 또한 뒤따르고 있었다. 허벅지의 근육이 점점 뭉치고 있었고, 발바닥의 물집이 소리 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던 것.

신성마을 마을회관에 도착했을 때, 다 걸었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널브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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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대장정을 응원온 화성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채인석 시장 ⓒ 최규석


"기분이 너무 좋다.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화성시민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우정읍과 장안면 주민들이 해남까지 와서 국토대장정을 응원하고 우리 지역현안을 지지하는 서명운동을 벌여줘서 너무 고마웠다. 가슴이 찡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꾹 참았다. 꼭 완주해서 목적했던 바를 이루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땡볕 아래를 걸어서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린 채 시장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오늘 하루 걸었던 소감을 밝혔다. 채 시장은 아직 발은 건재한데, 걸으면서 사타구니가 쓸려 많이 쓰라리다고 털어놓았다.

"내일은 본격적으로 아프겠지요?"

아픔을 호소하면서도 채 시장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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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환 해남군수와 채인석 화성시장 ⓒ 최규석


"박지원 대표가 민주당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국토대장정을 시작하기를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철환 해남군수 역시 지지를 아끼지 않겠다면서 격려해주었다."

이제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고통의 나날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아직은 채 시장의 발걸음이 가볍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다음 주 월요일, 태풍 볼레반이 남부지역을 강타할 예정이라는데, 채 시장은 과연 그 태풍의 영향권을 벗어나 순조롭게 국토대장정을 계속할 수 있을까? 지켜보자.

[오늘 걸은 길] 화산면 마을회관 - 구시리 - 원진리 - 백야리 - 신안리 - 영신리 - 신성마을회관 총 27km

[국토대장정 ①] 화성 원님, 522km 걷는 '개고생' 왜 선택했나
#채인석 #국토대장정 #박지원 #박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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