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자주 끊기나요? 위험합니다

[어느 알코올중독자의 고백②] 알코올상담센터에 제 발로 가다

등록 2013.11.19 20:16수정 2013.11.19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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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병 쌓기 소주가 물같은 날은 위험한 날이다
빈병 쌓기소주가 물같은 날은 위험한 날이다이정혁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 가누기가 어렵다. 열흘간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무너지는 건 결국 한순간이었다. 열흘 만에 넘어가는 소주는 그 달달함과 시원함이 물과 한 핏줄이다. 그리고 맞이하는 아침. 이 지긋지긋한 숙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쳐보지만, 매번 뜻대로 된 적은 없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알코올 상담 및 치료'였다. 열흘 전에 전화로 상담 예약을 하고 기필코 상담받는 날까지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의지 박약의 알코올중독자답게 상담 바로 전날에 폭음을 한 것이다.


오전 9시 30분, 예약 시간에 맞춰 센터를 찾았다. 2011년 기준으로 보건복지부 지정 알코올상담센터는 전국에 43개소가 존재한다. 다행히 내가 사는 도시에도 센터가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한적한 아파트 단지 입구 쪽에 자리 잡은 2층건물. 입구에서 기념으로 현판 사진을 촬영하는 순간에도 약간의 망설임이 있다. '스스로가 알코올중독임을 인정하고 제 발로 센터에 찾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조심스럽게 열린 문 안으로 한 발 떼어 놓으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저기… 9시 반에 상담 예약한 사람인데요…" 했다.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인상 좋은 남자 한 분이 반가이 맞이하며 차를 권한다. 상담실로 가 차를 기다리며 벽면 이곳저곳을 눈으로 기웃거리는데, 샤론 스톤을 닮은 한 외국 여성의 사진이 눈에 띈다.

술의 폐해를 알리기 위해 한 달 내내 술을 마시고 찍은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다. 영화배우 같은 외모에 탄력 있는 피부까지, 스물 남짓 보이던 아가씨가 주름지고 초췌한 40대의 중년 여성으로 변해 있다. '술을 끊으면 나도 20대의 피부로 돌아가는 건가?'라는, 사진 속 주인공의 의도와 걸맞지 않은 상상을 하고 있자니 커피 한 잔이 앞에 놓인다.

알코올상담센터 문을 열기 전까지도 망설임은 계속

그리고 간단한 소개 후에 이어지는 각종 테스트. 이미 인터넷에서 해본 적 있는 알코올중독 자가진단 테스트를 포함하여, 우울증 자가진단(BDI검사), 알코올 의존의 진단 기준 등등을 30여 분에 걸쳐 진행한다. 독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따분하지만 알코올 의존 진단 기준 중 몇 가지 항목(총 7개 항목)과 현재 나의 상태를 적어본다.


1) 내성이 있다
애초에 반병 정도면 기분 좋게 마시던 사람이, 점점 그 양이 늘어나는지를 측정해보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대학 입학 이후 줄곧 마시면 끝장을 보았기 때문에 주량은 한결같이 늘 '만땅'이었고, 그에 따른 내성도 최고치를 기록했다. 허나 요즘 들어 그 양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이는 내성이 사라진다기보다 알코올을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는 것이라고 한다. 가슴 아픈 현실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고 말술 앞에 헛개나무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2) 금단 증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손 떨림, 불면증, 식은땀, 환청 등이 나타나는데, 내게서 현재 보이는 증상은 약간의 불면증과 만취 다음 날의 손 떨림 정도였다. '설마 나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술 마신 다음 날 아침 해장국을 떠 입에 넣기 전에 딱 10초만 자신의 손을 주시해보기 바란다.


'해장국 한 숟갈이 이렇게 무거웠나'라고 느끼면 당신도 이미 알코올 의존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이러한 증상들이 심해지면 이제 술 마신 다음 날 해장술을 찾게 되는 것이라 한다. 문득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 나오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술에 절은 모습이 떠오른다.

알코올 의존의 진단 기준
아래 중 3가지 이상이 지난 12개월 사이에 있었던 경우
1) 내성이 있다.
2) 금단 증상이 나타난다. (손떨림, 불면, 식은 땀, 환시, 환청 등)
3) 원하는 양보다 술을 오랜 기간 많이 마신다
4) 금주하거나 절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5) 술을 구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술에서 깨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6) 사회적, 직업적 혹은 휴식 활동들이 술로 인해 단념되거나 감소한다
7) 음주에 의해 신체적 혹은 심리적 문제(위궤양, 대인관계 등)가 악화되는 줄 알면서도 음주를 계속한다.
3) 금주하거나 절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연초가 되면 작심삼일의 단골 메뉴로 사용되는 금주. 이거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술 없는 세상 무슨 낙으로 살아가나'라며 잔을 치켜드는 애주가들이 주변에 넘쳐나고, '그래, 술 끊고 얼마나 오래 사나 보자'라는 반 협박성 저주도 종종 등장한다. 지갑 그득히 쌓인 카드 전표와 거울에 비친 초췌한 몰골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술 마신 다음 날이면 늘상 끊는 술. 하지만 결심은 채 24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나머지 항목들은, 스스로 진단을 내려보길 바란다. 그 정도 애정과 관심은 자신에게 가져줘야 나르시스가 서운해 하지 않는다. 여하튼 사뭇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상담을 맡아주신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부드러운 어조와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로 인해 금방 흘러갔다.

'도파민', 이놈 하나는 기억해둘 만하다

치명적 유혹 싱싱한 해산물은 술을 부른다
치명적 유혹싱싱한 해산물은 술을 부른다이정혁

여러 가지 진단이 끝나고 나면 그 내용을 토대로 본격적인 상담에 들어간다. 종합적인 진단 결과는 중등도 이상의 알코올 의존 및 남용. 흔히 사용하는 알코올중독이라는 용어는 정확한 것이 아니며 '알코올 의존 및 남용'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이라 한다. 가장 먼저 받게 된 질문은 센터에 오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요즘 들어 술 마시면 필름이 자주 끊깁니다. 종전에는 아파트 벤치에서 두 시간 정도 잠들었던 적도 있고,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집에 온 경위가 생각나지 않는 적이 많습니다."

의학 용어로 블랙 아웃(black out)이라고 표현되는 필름 끊김 현상, 즉 단기 기억 상실이 내가 단주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였다. 복잡한 설명은 질색이니 쉽게 설명하자면, 술을 급하게 빨리 마시거나 공복 시에 들이키면 혈중 알코올 농도가 급상승하고, 그에 따라 당황한 뇌가 일시적으로 기억을 저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몸 따로 머리 따로 놀다가 한 순간 비명횡사할 수도 있는 게다.

두 번째 이유는 술 때문에 무언가 마음먹은 일, 예를 들면 아침 운동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인터넷 강의 보기와 같은, 규칙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술 마신 다음 날 놓아버리는 것이다. 일단 일어날 수조차 없이 '떡이 된' 육신에다, 가까스로 눈을 떠도 일이 손에 잡힐 리 없는 무력감, 그리고 하루 종일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은 숙취라는 이름의 뱀 한 마리. 줄넘기도 3일, 뱃살빼기 프로젝트도 4일을 못 넘기고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여러 질문들과 답변, 설명들이 오고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영어 나오면 긴장 타는 분들 계실 텐데, 이놈 하나는 기억해둘 만 하다. 왜냐면 이 녀석이 분비되면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드는데, 술을 마시거나, 당첨된 복권을 손에 쥐고 있을 때, <오마이뉴스>의 톱에 내 기사가 올라갈 때 도파민 분비가 급격히 증가된다.

도파민이 과잉분비 되면 환각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 과잉분비 상태에 점차 길들여지면 평상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에 만족 못하고 우울해지게 된다. 따라서 술을 지속적으로 마시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우울 증세는 이 도파민과 연관이 있다.

이 도파민이라는 녀석이 술을 끊는 데 중요한 이유는, 술을 끊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술을 대신하여 우리 몸에 도파민 분비를 촉진시킬 만한 무언가 즐겁고 기분 좋아지는 일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말씀 중에 이런 표현이 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약물도 선생님이 술을 끊게 할 수는 없습니다. 술을 끊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술을 끊음으로 인해서 내가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다는 행복한 상상을 하십시오"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말이다. 지난 20년간, 술로 인해 포기하고 좌절해야 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돌이켜보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화나거나 기분 좋거나, 날씨에 따라서,벗들과의 반가움에도 무조건 술과 함께했던 삶이었던 것 같다. 술을 빼고는 인생 자체를 논할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누구도 어떤 약물도 술을 끊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상담시간은 나의 술로 얼룩진 과거를 돌이켜보고, '앞으로 남은 삶을 알코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보낼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술을 멀리 한다는 것이 그만큼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기쁘고 행복한 일들에 가까워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술 말고 내 안을 도파민으로 가득 채울 새로운 무언가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마지막 숙제의 시간. 앞으로 한 달 후, 술 끊고 무언가에 빠져 행복해하는 나의 모습, 그리고 1년 후의 모습 그려오기. 행복한 상상만이 알코올과 결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신다. 다음주에는 일주일간의 단주 경험을 통해 약물치료 여부 등에 대해 결정하기로 했다.

끝으로 술과 함께했던 나의 과거 중에서 유일하게 술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프롤로그에서 언뜻 비쳤던, 지금의 아내에게 구애하던 장면이다. 아내는 학교 동아리 후배로 10년간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10년을 후배로만 지내다가 어느날 문득,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선후배 열댓 명이 모여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는데, 아마 3차쯤으로 기억한다.

만취한 상태에서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 꼬부라진 발음으로 "나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그때까지 나랑 사귈 건지 말 건지 결정해라" 그러고는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잠깐 넘어진 기억이 나고, 다시 돌아와 술잔 앞에 앉았는데 순식간에 주위가 얼어붙으며, 좌중 모두 입이 떡 벌어졌다. 내 이마와 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핏줄기들때문에. "결정했냐?" 그 말을 뱉고 난 뒤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다음 날 눈 뜨고 보니 아내의 자취방이었고, 곁에 잠들어 있는 아내를 발견한 것으로 우리의 교제는 이미 진행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우리를 연결해준 술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는 오늘까지만 하려고 한다. 술 마시는 시간과 비용의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줄어듦으로 인해 아내도 나의 단주를 간절히 바라는 중이니까. 술아, 이제 너를 놓아주려고 해. 술과의 행복한 이별의 과정, 나도 기대된다.
#알콜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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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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