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촌 성미산, 우리가 지켜야죠"

[현장] 서울 마포구민, 8일 저녁 산 정상서 촛불행사 열어

등록 2003.02.10 09:00수정 2003.02.1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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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5시경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는 2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매일 아침 성미산 중턱에 에어로빅을 다니는 30대 주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친구들과 성미산에 오르는 초등학생도, 20년 넘게 성미산에 올라 산책하시는 70대 할아버지도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베인 나무 위에 앉아 조용히 먼 곳을 응시하시는 할아버지가 계신 반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다들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나무에 올라타고 친구들끼리 모여서 숙덕거리며 무얼 하는지 키득거리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초등학교 자녀를 둔 한 주민이 마이크를 잡고 서울시장을 향해 "이 산을 죽이지 마라. 아이들의 놀이터를 빼앗지 마라"며 부르짖고 있었다.

이들은 더 이상 성미산을 해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격분했으나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놀이에 빠져있는 모습들을 보며 그 누구도 인상을 찡그리지는 못했다. 성미산은 그랬다. 이미 어린이들의 친구였고 어른들의 쉼터였다.

a 촛불행사전 모인 아이들의 모습

촛불행사전 모인 아이들의 모습 ⓒ 이지현

이들은 왜 금쪽 같은 토요일 오후, 성미산으로 모인걸까?

여기 모인 사람들은 주저 없이 말한다. 그동안 자신들을 행복하고 즐겁게 해준 성미산을 지키기 위해서 나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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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동의 없이 성미산 배수지공사 강행

서울시와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는 지난 29일 수요일 오전 10시경.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로 등산객이 없던 틈을 타서 성미산의 나무를 베어냈다. 성미산 정상부에 배수지를 짓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에 분개한 마포구 주민들은 이대로 놔둬서는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급기야 산 정상에 텐트를 치고 덕수궁 앞에서 집회를 갖는 등 성미산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성미산을 지키기 위한 계획 중의 하나로 8일 오후에는 촛불행사를 벌인 것이다.


a 아이들과 개를 데리고 촛불행사에 참여한 전미성씨

아이들과 개를 데리고 촛불행사에 참여한 전미성씨 ⓒ 이지현

29일 오전 10시경 산책을 하러 산을 올랐다가 나무를 베는 장면을 목격한 전미선(34)씨도 촛불행사에 참여했다. "개들을 운동시켜줘야 하기 때문에 매일 올라와요. 그 날도 어김없이 올라왔는데 20명 가까이 되는 장정들이 나무를 베고 있더라고요. 철거용역회사에서 나온 사람들 같았어요. 접근금지라는 끈을 둘러놓고는 경찰들이 그 안에는 못 들어가게 막고 서있더군요. 당신들은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라면서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꿈쩍도 안 했어요"라며 안타까워했다.

작년 5월에 이사온 이후로 자주 개들을 데리고 성미산에 오르는 전미선씨는 "가끔씩 올라 마음의 여유도 찾고 위안을 얻고 가는 산이 이렇게 황폐해 진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그 길로 내려가 <오마이뉴스>에 기사도 올리고 '성미산을 지키는 주민연대'에 가입도 하게 되었다"며 덧붙였다.


a 촛불을 들고 산봉우리를 오르는 마포구민들의 행렬

촛불을 들고 산봉우리를 오르는 마포구민들의 행렬 ⓒ 이지현

29일 오전에 산에 오르지 않았지만 성미산을 지키는 주민연대(이하 성지연)의 비상연락망 연락을 받고 달려왔던 김혜장(43)씨도 촛불을 들었다. 성지연은 2001년 7월경 처음 성미산 배수지 건설계획을 접한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결성한 단체였다.

"이 산은 망원동부터 합정동, 성산동, 서교동, 연남동까지 수천명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산이에요. 성미산 캠프도 하고 어린이집에서 얼마나 자주 이용하고 있는 산인데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가 있대요. 가끔씩 올라와서 운동도 하고 좋았는데 무엇보다 주위에 초등학교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라며 잘린 나무들을 보고 씁쓸해했다.

성미산 대책위 김종호 위원장은 "우리는 성미산 공사가 중단되고 성미산이 완전히 지켜질 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지역주민들과 함께 이뤄낼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히 다른 이들의 발언을 지켜보던 한 주민도 마이크를 잡고는 "나도 초등학생을 둔 아빠로서 한마디 하고 싶다"며 "성미산을 지키는 것은 서울시내를 지키는 것이자 우리 아이를 지키는 것"이라고 외치자 주민들은 박수를 치며 "옳소! 옳소!"를 외쳤다.

a 촛불행사 사회를 본 주항복씨가 아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촛불행사 사회를 본 주항복씨가 아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 이지현

성미산 축제 위원장이자 두 명의 초등학생 자녀를 둔 주창복(43)씨는 7년째 성미산을 오르고 있다. 그는 "어른들의 산책로가 없어지는 것도 속상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놀이터가 없어지는 것이 더 화가 난다"며 "지금 우리아이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이 산에서 놀고 있고, 이 산에 자기들만의 아지트도 만들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쌓아가고 있는데 이산을 죽이려 하는 것이냐"고 호소했다.

"전 사실 도시에서만 살아서 산의 이로움을 모릅니다. 성미산도 아이들의 등살에 아이들이 보채서 오게 된 거죠. 그런데 이곳에서 이웃을 사귀게 되었어요. 요즘엔 같이 모여서 아이들 자라는 얘기도 하고 어른들끼리 술 한잔도 하며 친하게 지내게 되었어요. 성미산을 통해 이웃사촌을 만들게 된 셈이죠. 성미산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입니다."

성미산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는 주창복씨는 옆의 초등학생인 아들 주재현(13)군을 바라보며 미소를 띄운채 말했다.

a 엄마의 무릎위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는 아이

엄마의 무릎위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는 아이 ⓒ 이지현

촛불행사를 마치고 천막 농성하는 곳에는 갈탄이 타고 있었다. 마포구의 아버지들은 밤새 천막농성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진해서 갈탄을 옮기고 있었다. 쌀자루 하나가득 넣은 무거운 갈탄을 이고 올라오는 이들에게선 짜증내는 얼굴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회사를 마치고 바로 도착해 정장을 입은 채로 옮기던 한 주민은 "이제 두 번째 나르는 거라 할만한데요"라며 웃어 보이기도 했다. 갈탄이 타는 모닥불 앞에서는 손을 녹이는 이웃들의 대화가 오갔다.

"예솔이 아빠도 한 짐 지고 오셨어요?"
"아, 그럼요, 두 번이나 지고 왔지요. 종호 아빠도 한 짐 지셔야죠."
"안 그래도 그 사람도 몇 번 날랐죠."

순간 기자의 귀에 자꾸만 꽂히는 말들이 있었다. 성미산에는 '~씨'라는 호칭은 없었다. 대신 이곳에선 '누구 아빠(엄마)' '누구네'으로 통했다. 예솔이 아빠, 민수 엄마가 있었고 재연이네가 있을 뿐이었다. 이전의 주창복씨의 말처럼 모두 성미산이 만들어 놓은 이웃사촌이었다. 이처럼 성미산은 가족과 가족을 이어주고 있었다.

성미산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성산1동에 사시는 박남규(75) 할아버지는 "이산에 오른 지 25년이 됐다"며 "회사에 다닐 때는 가끔씩 와서 머리도 식히고 했었지. 그런데 늙어서는 관절로 고생하고 약도 잘 듣질 않았는데 여기 매일 올라오고 하다보니까 어느새 관절염이 없어졌어. 내가 관절 때문에 15년을 고생했는데... 역시 산이 운동하는데는 최고야"라며 지난 날을 회상하셨다.

그리고는 "근데 29일인가 깡패 같은 놈들이 와서는 나무를 다 베어버렸어. 내가 식목일 날 와서 나무를 얼마나 심었는데 그놈들이 그걸 다 베어버렸어. 여기 이용하는 사람들이 5천명이 넘는데 왜 이 산을 죽이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라며 잘려나간 나무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a 촛불을 머리위로 들어올린 마포구민들

촛불을 머리위로 들어올린 마포구민들 ⓒ 이지현

성미산은 마포구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무를 심고 가꾸고, 또 많은 이들의 애정어린 눈빛 아래 자라왔다. 마포구민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의 배수지 공사를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에는 아직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 또한 이에 대응하는 마포구민들의 뒷산 지키기도 계속되고 있다. 시민을 위한 행정이 과연 이런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성미산 대책위의 주장

서울시장은 기습적인 벌목공사에 대해 마포구민에게 사과하라!

주민의 동의없는 배수지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성미산을 자연숲 그대로 보존하라!

반환경적 배수지계획을 철회하고 
환경피해가 적은 대체방안을 마련하라!

마포구청은 한양재단의 성미산 아파트 개발계획안의 입안을 거부하라

- 성미산 개발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 -

덧붙이는 글 성미산 대책위의 주장

서울시장은 기습적인 벌목공사에 대해 마포구민에게 사과하라!

주민의 동의없는 배수지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성미산을 자연숲 그대로 보존하라!

반환경적 배수지계획을 철회하고 
환경피해가 적은 대체방안을 마련하라!

마포구청은 한양재단의 성미산 아파트 개발계획안의 입안을 거부하라

- 성미산 개발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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