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꽃 핀 건 파보나마나 자주감자"

[문화유산답사 56] 감자꽃 시인, 권태응 선생을 찾아

등록 2003.02.16 10:18수정 2003.02.1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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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책자랑은 어려운 한문책
그렇지만 그것은 중국의 글이고,
아버지의 책자랑은 두꺼운 일본책
그렇지만 그것은 일본의 글이고,
언니의 책자랑은 꼬부랑 영어책
그렇지만 그것은 서양의 글이고,
우리우리 책자랑은 우리나라 한글책
온 세계에 빛내일 대한의 글이다.
- 권태응의 <책자랑>


a 충북 충주시 칠금동 381번지 권태응 선생이 태어난 집터다. 1972년 충주 수해이후 새로 지은 이 집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상당히 낡아 있고, 집 앞에는 권태응 선생과의 관련을 알리는 그 어떤 안내판도 없는 실정이다. 현재 권태응 선생의 사촌 동생 권태연씨가 살고 있다.

충북 충주시 칠금동 381번지 권태응 선생이 태어난 집터다. 1972년 충주 수해이후 새로 지은 이 집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상당히 낡아 있고, 집 앞에는 권태응 선생과의 관련을 알리는 그 어떤 안내판도 없는 실정이다. 현재 권태응 선생의 사촌 동생 권태연씨가 살고 있다. ⓒ 권기봉

아직 새 정부가 출범하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태클’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지난 1월 10일자 <뉴욕타임즈>에 보도된 전경련 상무 김석중씨의 ‘새 정부는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인터뷰를 시작으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 및 인수위 길들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듯한 움직임이 보인다.


특히 이달 들어서는 재계가 출연한 각종 연구소들까지 나서 전방위에서 맨투맨 압박을 가해오는 등 그동안의 ‘정권 초기 허니문’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특히 한나라당과 전경련,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이른바 ‘보수 동맹’이 적극적으로 ‘안티’를 거는 모습에서, 그 전의(戰意)가 예사롭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a 1918년 충주 칠금동에서 태어난 권태응은 일본 와세다대에 진학하나 ‘독서회’ 사건으로 구속· 퇴학 당하고 귀국, 글을 쓰며 투병 생활을 한다. 1948년 12월 ‘글벗집’에서 시집 <감자꽃>을 냈고, 199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같은 이름의 동시집이 나왔다. 그의 시는 약 308편쯤 되나 세상에 알려진 것은 94편밖에 안된다.

1918년 충주 칠금동에서 태어난 권태응은 일본 와세다대에 진학하나 ‘독서회’ 사건으로 구속· 퇴학 당하고 귀국, 글을 쓰며 투병 생활을 한다. 1948년 12월 ‘글벗집’에서 시집 <감자꽃>을 냈고, 199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같은 이름의 동시집이 나왔다. 그의 시는 약 308편쯤 되나 세상에 알려진 것은 94편밖에 안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보수와 극우의 합동 공세에 못 이겨 자칫 개혁의지가 퇴색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그것인데, 실제로 대통령 당선자나 인수위 등에서 재벌개혁이나 정치개혁 등에 대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듯한 발언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분위기는 또다시 반전, ‘가야할 길은 가야 한다’는 요지로 정리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새 정부의 개혁의지를 의심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나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개혁’을 기대하고 대통령 후보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갖는 걱정을 깨끗이 해결해주지는 못한 것 같다. 이미 새 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고건씨를 내정하는 등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자칫 개혁 의지를 잃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이 있어 입춘(立春)이 지난 지 벌써 보름, 길을 나선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a 그의 생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탄금대’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비가 서있다. 권태응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 되던 지난 1968년 5월 5일 제86회 어린이날을 맞아 ‘새싹회’ 회장 윤석중씨와 제일고보 동기 이해곤씨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것으로, 노래비의 동판은 훼손되었던 것을 1974년 5월 다시 만들었다.

그의 생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탄금대’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비가 서있다. 권태응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 되던 지난 1968년 5월 5일 제86회 어린이날을 맞아 ‘새싹회’ 회장 윤석중씨와 제일고보 동기 이해곤씨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것으로, 노래비의 동판은 훼손되었던 것을 1974년 5월 다시 만들었다. ⓒ 권기봉

아동문학가 권태응(權泰應) 선생의 <감자꽃>이란 시(詩)다. 동요로 만들어져 어린 시절 한번쯤은 들어보고 불러보았을 법한 이 시는, 일제(日帝)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갈아치우려 했던 이른바 창씨개명에 반항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의미야 한번 읊어보기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꽃 핀 감자는 말 그대로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이지 흰 감자가 아니며, 흰 꽃이 핀 감자 역시 파보나 마나 흰 감자라는 이야기다. 즉 ‘아무리 일제가 성과 이름을 갈아치운다 해도 한국 사람은 어디까지나 한국 사람이지, 일본 사람이 아닐뿐더러 될 수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에 돌을 던진 식민지 청년


권태응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4월 20일 충북 충주의 ‘옷갓’이라는 마을에서 아버지 권중희와 어머니 민병희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옷갓은 지금의 충주시 칠금동으로, 당시나 지금이나 안동 권(權)씨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몰려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학업에 열심이었던 그는 1932년 충주 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이하 제일고보)에 들어가게 된다. 충주 공립보통학교 때나 제일고보 때 모두 성적이 우수했는데, 특히 문학과 음악, 체육 등에서 좋은 성적이 나왔다 한다. 앞으로 감수성 짙은 글을 지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a 권태응 선생이 8세 이후의 시기를 보내고, 결국 세상을 떠날 때 머물렀던 충주시 칠금동 362번지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계성유치원이 있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했다고 한다. 권태응 선생의 어린이 사랑을 다시 떠올려 본다.

권태응 선생이 8세 이후의 시기를 보내고, 결국 세상을 떠날 때 머물렀던 충주시 칠금동 362번지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계성유치원이 있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했다고 한다. 권태응 선생의 어린이 사랑을 다시 떠올려 본다. ⓒ 권기봉

그러나 순탄치 않은 인생을 암시라도 하는 듯한 일화가 전해진다. 먼저 종로구 화동 제일고보 졸업 직전, 여느 학교가 그렇듯 졸업앨범을 만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졸업 앨범에 일본을 상징하는 국화꽃 문양이 그려져 있던 것. 이를 보고 화가 난 권태응과 그의 친구 등 7명은 그 앨범을 만든 학생 편집위원을 불러내 혼쭐을 내줬는데, 그는 다름 아닌 ‘세도 막강’ 친일파의 아들이었기에 경찰 조사를 피할 수 없었다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제일고보 3학년 재학 당시 친한 친구들과 함께 따뜻한 봄날 학교 근처 북악(北岳)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던 그의 발 아래로 문득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더란 것이다. 젊은 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뜻하는 바가 있었는지 정확한 까닭이야 알 수 없지만,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큰 돌을 들어 그 쪽으로 힘껏 던졌다고 한다. 그때 염홍섭이라는 친구가 그 장면을 사진기로 찍었는데, 그만 이게 문제가 된 것이다.

사연인즉슨 당시 권태응 선생은 학교가 가까운 종로구 재동 당숙의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협박장이 날아드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사건 조사차 집을 찾았던 일본 경찰은 사건과는 무관하게도 그의 ‘북악 사진’을 발견, 이런 사진을 찍게 된 이유와 사진에 붙여놓은 이름 ‘재건(再建)’이 ‘조선 독립’을 뜻하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서도 따져 물었다 한다.

이 때문에 퇴학 위기까지 몰렸다지만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인지라 담임과 교장 등이 중재에 나섰고 결국 학적부에 ‘요주의 인물’이라는 말을 넣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한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만약 사실이라면 그 ‘북악 사진’에 나온 돌팔매질이 정말로 일제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공부만 잘하는 단순 모범생만은 아니었다는 사실 정도는 말해준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제일고보 동기생인 이해곤씨(전 충주시 교육감)는 “권태응은 조선어에 대한 관심도 남달라 조선어 시간마다 질문을 퍼부어 조선어 선생이 아주 못마땅해 했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 제일고보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한일해협을 건너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학과로 진학하지만, 항일 운동 등을 이유로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하고 만다. 이후 그는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을 모아 독서회를 만드는 등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연행되다가 결국 1939년 5월 치안유지법 위반과 내란음모 예비죄라는 혐의로 실형 3년을 언도 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된다. 이제 정말로 고단한 날들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a 충주 시내에서 탄금대에 가기 못미처, 사진과 같은 안내판이 우뚝 서있다. 그러나 이 안내판만을 믿고 갔다가는 권태응 선생의 생가를 찾지 못하는 수가 있다. 200m를 들어가도 “여기가 권태응 선생의 생가요”하는 안내판이 없어, 보다 세심한 배려를 필요로 한다.

충주 시내에서 탄금대에 가기 못미처, 사진과 같은 안내판이 우뚝 서있다. 그러나 이 안내판만을 믿고 갔다가는 권태응 선생의 생가를 찾지 못하는 수가 있다. 200m를 들어가도 “여기가 권태응 선생의 생가요”하는 안내판이 없어, 보다 세심한 배려를 필요로 한다. ⓒ 권기봉

1년여의 감옥 생활을 통해 얻은 것이라곤 평생 지병이 될 폐결핵뿐이었다. 결국 병세가 악화돼 더는 수감 생활을 하지 못하고 1940년 6월 출옥, 인천 적십자 요양원 등을 거치게 된다. 이때 만난 영동 출신 박희진이라는 간호사와 결혼, 요양원에서 퇴원한 뒤 결국 1944년 고향 충주로 낙향해 동요를 지으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 세상에 나온 것이 <고추밭>과 <율무> <옹달샘> 등 향토색 짙은 30여 편의 동요 중 21편이다.

“그때 한옥은 정말 볼만했지…”
‘감자꽃 시인’의 사촌동생 권태연씨

충북 충주시 칠금동 ‘감자꽃 시인’ 권태응 선생이 태어난 생가를 찾은 기자는 시인의 사촌동생인 권태연씨(칠금동, 48)를 만날 수 있었다.

현재 권태응 선생의 생가에서 살고 있는 그는 “권태응 선생님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는 많다”며 “수해 이전에는 한옥집이 있었는데 아주 멋있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아마도 1972년 당시의 수해(水害)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당시 충주를 지나는 남한강이 범람, 이 일대가 물에 잠기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집들을 보다 높은 지대로 옮겨 다시 지었다.

그는 이어 “권태응 선생이 이곳(칠금동 381번지)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보낸 곳은 칠금동 362번지 계성유치원이 있던 자리”라며 “사촌 형(권태응)이 돌아가신 곳도 거기”라고 말했다. 즉 초입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은 그저 권태응 선생이 태어난 자리만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시나 단체 등에서 별다른 지원은 없다”는 그의 말 속에서 권태응의 현재적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한편 권태응 선생의 묘소는 충주시 금릉동 광명산, 이른바 팽고리산에 있으며, 유족으로는 현재 미국에 거주중인 아들과 서울에 있는 남동생이 있다.
/ 권기봉
한편 그는 야학(夜學)에도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농촌계몽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제일고보 시절뿐만 아니라 병 요양차 충주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야학에 참여했다고 하며, 때로는 각본을 만들어 소인극 등을 상연해 농민과 학생들의 화합을 유도했다고도 한다.

그러다가 1945년 8월이 되었고,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젊어 고생한 사람일수록 불행은 더 많이 찾아드는 것인지, 개인적으로 동요집 <감자꽃>을 내고 조국은 광복을 맞았다지만 그의 생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특히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병세가 더욱 악화, 결국 1951년 3월 28일 만 3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적극적인 활동도 펴지 못했고 일제 당시 누구처럼 나서서 친일 행각을 벌이지도 않았기에, 그가 세상을 떠나도 알아주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이 같은 인식은 광복 58년을 맞는 지금,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다. 그에 대한 이 같은 대접은 그의 생가에서 어김없이 드러났다.

안내판조차 제대로 마련 안 된 생가

충북 충주에 가면 ‘탄금대(彈琴臺)’라는 명소가 있다. 신라 진흥왕 12년인 551년 우륵이 망국(亡國) 가야를 떠나 이곳에서 가야금을 탄 데서 유래한 이름인데, 탄금대 바로 아랫동네에 ‘감자꽃 시인’ 권태응 선생이 나고 자라고, 타계한 장소가 있다.

a 안내판을 따라 100m쯤 들어온 곳에서 진행 방향으로 찍은 사진이다. 권태응 선생의 생가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녹색 설치물 뒤쪽에 있는 허르스름한 집이 그의 생가다.

안내판을 따라 100m쯤 들어온 곳에서 진행 방향으로 찍은 사진이다. 권태응 선생의 생가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녹색 설치물 뒤쪽에 있는 허르스름한 집이 그의 생가다. ⓒ 권기봉

먼저 충주 터미널이나 충주역에서부터 출발하자면, 탄금대나 가금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탄금대 조금 못미처 충주 잔디구장에서 내린다. 잔디구장 입구에 “감자꽃 시인 권태응선생 출생지 200m”라는 안내판이 있으니 다 찾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방심은 말자. 이 안내판이 거의 유일무이한 것인데, 이것만 가지고는 권태응 선생의 생가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뚜벅뚜벅. 200m쯤 온 것 같은데 주변에 시인의 ‘생가’로 보이는 듯한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집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표지도 없고 왼쪽이나 앞쪽은 그저 흙먼지 날리는 벌판이다. 요즈음에는 주변에 위락단지를 들이느라 흙을 파헤쳐 놓아 더욱 황량하기만 하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대로 200m쯤 들어오기는 했는데, 더 이상 그의 생가를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다.

a 권태응 선생의 생가 앞에는 높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서있다. 이전에는 이렇게 황량하지 않고 나무 아래 정자도 있고, 집들도 많았다고 하나, 주변에 위락단지가 들어서고 소방도로가 뚫리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한다.

권태응 선생의 생가 앞에는 높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서있다. 이전에는 이렇게 황량하지 않고 나무 아래 정자도 있고, 집들도 많았다고 하나, 주변에 위락단지가 들어서고 소방도로가 뚫리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한다. ⓒ 권기봉

근처에 상점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어도 아직은 날이 찬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서있는 ‘200m 지점’과 안내판 자리의 중간쯤에 있는 ‘충주 JTS문화관’에 들어가 물어보아도 그곳에서 생각하는 ‘문화’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들려오는 대답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것뿐이다. … 그럼 누가 알죠?

결국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찾아 도움을 구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찾은 권태응 선생의 생가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집 자체가 이미 쇠락했을 뿐만 아니라 집 주변이 개발될 예정이어서 담장 밖은 그저 질퍽거리는 진창일 뿐이었다. “이전에 즐비했다던 주변의 집들이나 정자(亭子) 등은 이미 헐린 지 오래”라는 것이 권태응 선생의 사촌동생 권태연(칠금동·48)씨의 설명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35년째 탄금대에 서있는 ‘감자꽃 노래비’와 매년 5월 열리는 ‘권태응 문학제’ 정도가 아닐까. 감자꽃 노래비는 권태응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 되던 지난 1968년 5월 5일 제86회 어린이날을 맞아 ‘새싹회’ 회장 윤석중씨와 제일고보 동기 이해곤씨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것이고, 권태응 문학제는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행사로서 지난 1997년부터 매년 5월 열린 바 있다. 행사 기간에는 권태응 생가와 묘소 답사 및 어린이 백일장, 동요제 등의 행사가 열려 지역민과 동호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원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참여하자

a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12년인 551년 우륵이 망국(亡國) 가야를 떠나 이곳에서 가야금을 탄 데서 유래한 이름인데, 바로 아래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권태응 선생도 이곳 남한강에서 멱도 감고 고기도 잡으며 유년을 보냈을 것이다. 탄금대 공원 내에 감자꽃 노래비가 있다.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12년인 551년 우륵이 망국(亡國) 가야를 떠나 이곳에서 가야금을 탄 데서 유래한 이름인데, 바로 아래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권태응 선생도 이곳 남한강에서 멱도 감고 고기도 잡으며 유년을 보냈을 것이다. 탄금대 공원 내에 감자꽃 노래비가 있다. ⓒ 권기봉

권태응 선생의 생가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결국 세상을 떠날 때 머물렀던 집을 보고 나오던 길, ‘잔디구장 옆 골목 입구뿐만 아니라 집 앞에 안내판이나 표지석 등을 세운다면 일부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가 될 텐데…’하는 아쉬움이 가시질 않는다. 물론 공적인 부분에서 관(官)의 지원을 요구하는 일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필요하다면 ‘충주작가회의’ 등 지역 사회에서 문학과 역사 등에 관심 있는 개인이나 단체만 모여도 안내판이나 표지석 등을 세우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즉 굳이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기다릴 일도 없이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라도 먼저 나서서 행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주인의식과 참여의식은 결국 새 시대의 새 패러다임이 아닐까? 우리는 이미 직접 참여를 통해 세상이 조금이나마 바뀌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한 바 있다.

a 사진에 보이는 대문산에 탄금대가 있고, 잔디구장을 기준으로 맞은편에 권태응 선생의 생가가 있다. 지난 1997년 5월 이래 매년 ‘권태응 문학제’가 열리고 있는데, 생가와 묘소 답사 및 어린이 백일장, 동요제 등의 행사가 열려 지역민과 동호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에 보이는 대문산에 탄금대가 있고, 잔디구장을 기준으로 맞은편에 권태응 선생의 생가가 있다. 지난 1997년 5월 이래 매년 ‘권태응 문학제’가 열리고 있는데, 생가와 묘소 답사 및 어린이 백일장, 동요제 등의 행사가 열려 지역민과 동호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전해진다. ⓒ 권기봉

전체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새 정부의 개혁 의지가 퇴색되는 것을 걱정만 하기 이전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나서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주 꽃(개혁의지를 가진 새 정부) 핀 건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실질적인 개혁정부)’이길 걱정하고 의심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먼저 그 ‘감자’가 제대로 자라도록 나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자주 꽃 핀 감자가 흰 감자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큰 관심에 감사합니다. 새 봄, 유쾌한 2003년을 위한 멋진 출발을 하는 봄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이며, 개인 사정으로 내달 중순까지 연재를 중단합니다.

덧붙이는 글 그동안 독자 여러분의 큰 관심에 감사합니다. 새 봄, 유쾌한 2003년을 위한 멋진 출발을 하는 봄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이며, 개인 사정으로 내달 중순까지 연재를 중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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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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