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강제 축출된 동아투위 위원들은 6개월 동안 출근시간에 회사 앞에 도열한 뒤 신문회관 혹은 종로 5가 기독교회관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동아투위
그러나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자유언론 싸움과 이를 지지하는 시민의 함성이 커지면서 이에 정치적 위기를 느낀 박정희 유신 정권과, 정권에 굴복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자유언론 싸움에 뛰어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 피디, 아나운서 113명을 이듬해 봄에 쫓아냈다.
4년이 지난 1978년 10월 24일. 해직된 우리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의 기념일을 맞아 당시 언론이 일체 보도하지 않았던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한 사건들'(1977.10 – 1978. 9)을 일지 형식으로 모아서 필경 유인물 300매에 담아 배포했다. 유인물 제목도 '민주인권사건일지'였다. 예를 들면 1977년 11월 초에는 이런 사건들이 담겨 있었다.
<1977. 11월>
▲ 고려대학교에 반정부 유인물 - 11월 4일 캠퍼스 안에 살포된 유인물 사건으로 고광진 김성만 군 등 2명 구속
▲ 서울대학교 11.11 데모. - 10월 7일에 이어 또다시 대규모 유혈 데모. 3,000여 명의 학생이 참가. '반민주구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반정부 구호와 "구속자 석방" "총장 사임" 등을 외치며 경찰과 대치. 밤 7시경 경찰은 도서관에 페퍼포그를 쏘아대며 난입, 학생 100여 명을 연행. 연성만 진재학 김경택 여균동 이철균 신희백 장기영 김부겸 양기운 문성훈 군 등 10명 구속
아무런 평가 없이 발생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옮긴 일지 형식의 '사실 보도'였다. 유신 정권은 이 유인물을 '사실 왜곡'이라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동아투위원 10명을 구속했다.
가을이 되면, 이 두 개의 사건이 늘 떠오른다. 이 두 사건은 내 청춘의 가장 강렬한 초상이었으며, 내 젊음과 이후의 삶을 압도했다.
그때 우리는 한 줄의 '사실 보도'를 위해,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언론을 위해, 해직의 아픔과, 감옥의 고난을 치러야 했다. 단 한 줄의 '사실보도'는 그렇게 고귀한 것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언론의 자유는 그만큼 소중한 것임을 그때 뼈저리게 경험했다.
너무 쉽게, 함부로 기사를 쓰는 지금 '기자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한국의 언론자유는 참으로 풍성해졌다. 그런 환경 속에서 지금 한국의 '기자들'은 너무도 쉽게, 너무나 함부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 넘쳐나는 언론자유의 토양 위에 거짓, 왜곡, 부풀리기, 자극적인 제목과 기사, 게으르고 저질스러운 '따옴표 저널리즘'이 차고 넘친다. 언론의 생명인 신뢰를 죽이는 암과 같은 죽음, 파멸의 길인데도 한국 언론은 그냥 그쪽으로 치닫는다. 어디에까지 가야 자신들이 벼랑 끝에 서 있음을 알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