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한·소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엠바고를 걸어 각사 편집국장에게 브리핑했다. 정상회담 전날 보도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로이터>, <유피아이>(UPI) 등 외신이 정상회담 개최 닷새 전에 이 사실을 보도했고, 심지어 미국 국무부가 한·소 정상회담 개최를 환영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래서 <한겨레>는 외신 보도들을 모아 5월 31일자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이를 엠바고 위반이라며, 샌프란시스코에까지 와서 <한겨레> 기자는 브리핑 룸을 나가라며 소란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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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바고 소동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런 소동이 벌어진 연유는 엠바고(보도유예) 때문이었다. 청와대는 한·소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엠바고를 걸어 각사 편집국장에게 브리핑했다. 정상회담 전날 보도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로이터>, <유피아이>(UPI) 등 외신이 정상회담 개최 닷새 전에 이 사실을 보도했고, 심지어 미국 국무부가 한·소 정상회담 개최를 환영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러니까 청와대가 한국 언론에 요청한 엠바고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한겨레>는 외신 보도들을 모아 5월 31일자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이를 엠바고 위반이라며, 샌프란시스코에까지 와서 <한겨레> 기자는 브리핑 룸을 나가라며 소란을 피웠다.
샌프란시스코의 소동은 그냥 흐지부지 끝났다. 원래 카르텔의 '담합'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이라도 무시하고 깨버리면 무너지는 것이다. 브리핑 룸을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우리를 물리력으로 끌어내지는 못했다.
창간 초기, <한겨레>는 '불편한 존재'
<한겨레> 창간 직후부터 기자단과 한겨레 기자들 사이에는 기자단 카르텔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한겨레> '20년의 역사'를 담은 책 <희망으로 가는 길>(2008)에는 창간 초기 <한겨레> 기자들이 출입처 독과점을 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한겨레의 등장은 이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중견 기자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한겨레 기자의 기자실 출입을 막은 것은 '권언 유착의 호시절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으니 너희들은 이 카르텔에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창간 때부터 윤리강령을 채택하여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한 한겨레 기자는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한겨레는 초지일관했다. 공공기관의 기자실은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자의적으로 결성된 기자단이 개별기자의 출입여부를 결정할 아무런 권한이 없고, 국민의 알권리를 위한 취재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자실을 사용하겠다는 게 모든 한겨레 기자의 원칙이었다."
- <희망으로 가는 길> 119쪽
창간되고 5개월 남짓 지난 시점인 1988년 10월 초. 2대 경찰팀장이던 김형배 기자(1980년 <조선일보> 해직 기자 출신으로 한겨레 창간에 참여)가 서울시경찰국(현 서울시 경찰청) 기자실로 들어서려 했으나, 경찰이 막았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도 동조했다. 경찰 간부 간담회 때도 <한겨레> 기자의 동석을 가로 막았다. 그 가운데는 <조선일보>에서 해직되기 전 출입처에서 알고 지내던 기자와 경찰 간부들도 있었다.
"...이날은 끝장을 보기로 결심했다... 기자실로 그대로 들어가 각 언론사 책상과 부스를 부쉈다. 놀란 기자들은 그저 멍하니 지켜봤다. 김형배는 뒤이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울시경 공보과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집기를 주먹과 발로 부쉈다. 날벼락을 맞은 서울시경 간부와 출입기자들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제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겨레> 기자의 출입을 허용하기로 했다. 서울시경 출입 제한 조치가 풀리자 일선 경찰서 장벽도 허물어졌다."
- <희망으로 가는 길> 118쪽
구악(舊惡)기자들 추악한 모습 폭로
기자단의 추악한 모습을 폭로한 '보사부 촌지사건'(1991.11.1.) 보도는 <한겨레>가 창간 초기, 기자단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일반 기자들에게 얼마나 '불편한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