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고 사태, '등교거부'와 '폐교'가 맞서는 상황

교육의 공공성 확보가 최우선

등록 2003.05.09 18:28수정 2003.05.1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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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전남도교육청에 폐교신청서를 낸 한빛고 사태는 우리 사회의 사립학교 교육에 대한 단면을 명확히 보여준다.

수 백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지금도 수 백명이 학교를 다니며 미래의 꿈과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배움터를 한 개인의 사유물로 여기고,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문 닫아 버리는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a 지난 5월 2일 윤덕홍 교육부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를 하고 있는 한빛고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

지난 5월 2일 윤덕홍 교육부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를 하고 있는 한빛고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 ⓒ 공대위

교육적 행위를 담아낼 그릇으로서의 학교는 마땅히 공적(公的)이어야 한다. 사적(私的) 비용을 들여서 세웠다고 하더라도 '학교'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것은 공공의 것이 된다. 더욱이 수많은 뜻 있는 자들이 새로운 대안학교에 희망을 품고 십시일반 모금까지 했던 한빛고는 더욱 그렇다.

98년 개교 직후 한빛고는 상당한 공공성을 유지하였다. 설립 과정에서부터 교육적 소신과 개혁적 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서울과 광주에 후원회를 조직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키워가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신규 교사도 투명한 공개 경쟁을 통해 채용했다. 모 국회의원은 5.18 민주화운동 보상금 1억원을 설립기금으로 선뜻 기부하기도 했다. 98년 11월에는 교육부 지정 자율학교 시범운영 대상학교에 선정되기도 했다.

교육의 공공성 확보와 학교 운영의 투명성, 민주성 강화에 제동이 걸린 것은 2001년 김길 이사와 안행강 이사 두 부부의 이사장 및 학교장 동시 취임을 위한 김창수 교장 사퇴 종용 시도에서부터이다.

a 한빛고 사태를 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국토 순례중인 한빛고 학생들

한빛고 사태를 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국토 순례중인 한빛고 학생들 ⓒ 공대위

그 후 한빛고는 흔히 볼 수 있는 사립학교의 전철을 밟기 시작한다. 즉 학교의 사유화 및 족벌 체제화, 자율성 확보를 빙자한 독선과 전횡, 불투명, 통제 강화, 인사 파행, 회계 부정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한빛고 구성원들의 '새로운 학교 지키기'가 시작된다. 교사회, 학부모회, 졸업생 등은 '건학 이념의 훼손을 염려'하는 성명서 발표를 시작으로 수 차례의 면담과 탄원, 삭발 농성, 단식, 1인 시위, 결의대회, 걷기 대회가 이어졌고 급기야 학부모들의 학생 등교거부 사태까지 치닫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등교거부란 학교 현장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한 부활을 믿습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라면서 "조속한 사태 해결을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서 절박한 심정에서 등교거부를 강행했다"고 말했다.


사태가 확산되자 학교법인 거이학원에서는 등교거부 결정 전 이미 전남도교육청에 폐교 신청서를 접수하였고, 사용자로서 최후의 강수를 강행하고 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체 대표가 더 이상 돈이 안되거나 경영이 불가능 할 경우 행하는 최후의 수단을 학교법인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등교 거부'와 '폐교'가 맞서는 심각한 상황이 지금 한빛고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형국을 흔히 '갈 때까지 갔다'라고 말한다. 양측의 의지에 의한 사태 해결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수많은 재학생들이 다니던 학교를 떠나 이리 저리 흩어져야 할 지도 모른다.

전남도교육청은 권한 밖이라며 나몰라라 하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 또한 사립학교법의 한계를 들며 손을 놓고 있다. 어른들의 외면 속에 상처는 더욱 깊어졌고 그 아픔은 고스란히 학생들의 몫이다.

뭔가 참신하고 다르게 시작했던, 그래서 많은 교육 주체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았던 대안학교 한빛고도 역시 '대한민국의 사립학교'였던 것이다.

a 작년 11월 20일 한빛고 정상화 촉구 결의대회 도중 남교사 전원(14명)이 삭발 후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작년 11월 20일 한빛고 정상화 촉구 결의대회 도중 남교사 전원(14명)이 삭발 후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 김태문

우리는 과거 상문고와 충남의 정의여중고 사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학교의 사유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교육주체들이 피해를 봤으며, 한참 자라는 청소년들의 가슴속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는지를….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악순환은 이제 막아야 한다. 국운을 걸고 고리를 잘라야 한다. 똑같은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1년 3개월의 학교장 공석과 재단 비리 의혹, 독단적인 학교 행정, 재단 전입금 출연 거부, 교장, 교감, 생활 교사에 대한 인사 파행 등으로 얼룩진 한빛고가 '새로운 대안학교'로서의 희망을 저버린 채 닻을 내려버릴 것인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이제는 노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한빛고 문제의 해결은 단지 전남 담양의 조그마한 대안학교 살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학의 공공성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중 차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빛고등학교 헌장

한빛고등학교는 맹목적인 입시 위주, 학업 성취 위주의 교육을 벗어나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능력에 맞는 교육 활동을 통하여 학생의 존엄성을 실현코자 한다.

자아의 실현이라는 최종의 도달점은 같으나, 저마다의 독특한 경험과 개성을 인정하여 출발점을 달리 하는 개인별, 능력별, 수준별 교육을 지향한다. 상급 학교 진학만을 위한 학업 성취 일변도의 교육 풍토를 극복하고, 머리에는 학문을, 가슴에는 덕성을, 손에는 노작을 키우고 익히는 조화로운 인간상을 구현한다.

또한 희생과 봉사 정신을 바탕으로 이웃과 민족, 인류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적 인간의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하여 수요자 중심의 다양한 교육개혁방안으로 도입된 자연현장실습 등 체험 위주의 교육을 실시하는 특성화고등학교를 설립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학교 운영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교육 연구와 실천에 전념할 수 있는 기풍을 진작코자 뜻있는 시민들의 성의를 모아 한빛고등학교를 설립한다.

1998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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