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고, 학교 정상화 국토대장정

폐교 신청 한빛고등학교 학생들 400km 행진중

등록 2003.05.16 13:03수정 2003.05.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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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고3 학생들은 학생이라기보다 수험생이라고 불린다. 고3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의 식단까지 짜가며 함께 대학입시를 준비한다. 이런 고3 학생들이 교실을 나와 열흘째 길거리 위에서 학교의 정상화를 외치고 있다. 더 이상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없게 된 데 따른 것이다.

더구나 서울에서 시작하여 광주 담양에 있는 학교까지 장장 400킬로미터를 걷는 국토대장정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빛고등학교다. 현재 한빛고등학교는 폐교신청 되어 있는 상태다.

a 국토대장정 중인 한빛고 학생들 대형 레미콘 트럭이 지나가는 국도는 더위도 더위지만 우선 무섭다.

국토대장정 중인 한빛고 학생들 대형 레미콘 트럭이 지나가는 국도는 더위도 더위지만 우선 무섭다. ⓒ 전희식

'너희들은 학교를 지켜야 한다'며 교사들과 학부모가 나서서 고3 학생들의 수업거부를 극구 말렸지만 투표를 거쳐 한빛고 3학년 학생들은 압도적인 다수가 무기한 등교거부를 결의하고 국토 대장정에 나섰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1,2학년 후배들이 수업거부와 등교거부의 집단행동을 시작했을 때도 교실을 지키며 공부를 계속해나가던 3학년들이 끝내 교실을 나와 책가방을 놔둔 채 거리로 나선 것이다.

한빛고 3학년 학생들의 국토대장정은 지난 7일 서울 정부종합청사 교육자원부 앞에서 시작하여 16일 현재 전북 임실을 지나고 있다. 하루 30킬로미터 안팎씩 걷고 있다. 이들은 14일 전라북도 전주시에 도착하여 전라북도 도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재차 학교 정상화를 요구하는 한편 시내를 행진하며 시민들을 대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의 절박한 사정을 알리기도 하였다.

"국토 대장정을 시작하고 바로 학교가 폐교신청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그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 학교인데..." 말끝을 흐리고 숨을 고르는 3학년 최민화(20)양의 말이다.
".... 너무도 소중한 학교생활이었어요. 그래서 지금 힘이 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걷고 있어요."

여러 날 아스팔트로 위로 쏟아졌던 초여름 햇살은 이들의 얼굴을 새까맣게 태웠고 얼굴이 검게 타는 동안 이들은 외모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크게 성숙시킨 것 같다.


같은 반 한별(19)군은 학교사랑을 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a 지난 14일 전라북도 교육청에서 기자회견 중에 한 학부모가 일어서서 보충 설명을 하고 있다.

지난 14일 전라북도 교육청에서 기자회견 중에 한 학부모가 일어서서 보충 설명을 하고 있다. ⓒ 전희식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서 학교 가고 싶은 마음에 방학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던 적이 없었어요. 한빛고 와서 그런 경험을 한 거예요. 선생님이 하도 보고 싶어서 방학이 지루해지는 경험을 한빛고등학교에 와서 처음 하게 된 거예요. 공휴일도 없었으면 할 정도라면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5.18 광주 민주항쟁 기념일 때는 주먹밥을 지어주면서 우리나라의 살아 있는 역사를 들려 주었고 새만금 갯벌로 데려가서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것도 다 한빛고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 너무나 행복했던 것들이 사라진다는 생각에 한빛고의 폐교는 상상할 수도 없다는 생각에 이들은 학교정상화라는 깃발 하나 들고 오늘도 걷고 있다.

a 행진중인 3학년 한별 군. 학교 가고싶어 공휴일이 싫었던 체험을 한빛고에 와서 하게 되었다고 했다.

행진중인 3학년 한별 군. 학교 가고싶어 공휴일이 싫었던 체험을 한빛고에 와서 하게 되었다고 했다. ⓒ 전희식

학생회장인 김바다(19)군은 지금 학교의 상황이 너무 원망스럽다고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가고 싶은 게 다들 같은 마음일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최악의 경우 한 해 재수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학교의 정상화를 정면으로 요구하면서 거리로 나섰던 오늘의 경험을 가지고 어른이 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걸로 생각한다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세족식이라는 걸 할 때였어요. 선생님들이 저희들을 다 앉혀 놓고 한 사람씩 발을 씻겨주는 것이었어요. 선생님 앞에 발을 내밀기가 너무 쑥스러웠어요. 제 발을 어루만지며 고루고루 씻겨주시면서 제게 해주셨던 선생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요. 형님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기도 한 선생님의 얼굴을 저는 평생 못 잊을 겁니다."

이들이 천안을 지날 때였다고 한다. 차를 세운 어느 운전자가 너희들 뭐냐고 하길래 전단지를 주었더니 한참 후에 그 차가 다시 와서는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를 나눠주었다고 한다. 자기도 그 지역 고등학교 체육선생이라면서 힘내라며 격려해주어 너무 고마웠다고 한다.

체력이 약한 학생이 힘들어 할 때는 서로 다리를 주물러주기도 하지만 이러다가 다치거나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겁이 나서 집으로 가라고 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고 한다. 이럴 때면 보고 있기라도 하듯이 꼭 졸업생들이 행진에 나타난다고 한다. 선배가 사주는 짜장면 한 그릇은 지친 이들에게 큰 힘을 건네준다.

a 최민화 학생은 알고보니 필자가 아는 분의 딸이었다. 세상의 깊은 인연에 서로 놀라워 했다.

최민화 학생은 알고보니 필자가 아는 분의 딸이었다. 세상의 깊은 인연에 서로 놀라워 했다. ⓒ 전희식

걷는 게 너무 힘들어 지름길로 가자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둘러가더라도 사람들이 많을 길을 따라 예정대로 가야 하는데 걸어 온 길보다 남은 길이 너무도 막막하여 그런 말이 나왔지만 이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지금은 본교가 있는 전라남도 경계에 이르고 있다. '한빛 정상화!', '희망!'이라는 구호로 이들은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있다.

'불가능한 꿈 하나씩 가슴에 품자'는 최근 읽은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는 김바다군은 중학교 때 자기보다 공부 못했던 일반고등학교 간 친구의 수능 모의고사 점수가 자기보다 더 나왔다는 걸 알았을 때 슬펐지만 이곳 한빛고등학교에 평생 갈 것 같은 친구가 있고, 사랑하는 선생님이 있는 한 이 순간의 이 행복감을 꼭 지키고 싶다고 했다.

국토대장정 팀들은 내일(17일)이면 한빛고등학교에 도착하고 저녁 6시에 1,2 학년들과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과 지역의 공대위(한빛고등학교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대대적인 환영식 겸 학교 정상화 촉구 대회를 벌인다.

5.18 기념식을 광주 망월동에 가서 하는 것으로 국토 대장정은 막을 내리지만 한빛고등학교의 정상화 싸움은 새로 시작이다. 20일에 재단측과 공대위의 협상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a 학생회장인 김바다 군. 지금의 체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학생회장인 김바다 군. 지금의 체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 전희식

학생들의 수업거부, 등교거부가 길어지면서 아이들이 없는 텅 빈 학교를 바라보면 눈물이 핑 돈다는 박성준(30. 윤리철학) 교사는 학교 마당 이곳저곳에 하루가 다르게 잡초들이 무성해지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고 털어 놓았다.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한빛고에 입학한 최민화 학생은 평택 근처에서 서울로 향하는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의 새만금 살리기 3보1배 팀을 만나면서 다시 힘을 내게 되었다고 했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우리 사는 세상은 과연 아름다운가?
이 학생들에게 있어서만큼은 학교가 정상화 되느냐 마느냐에 그 여부가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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