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위기가 찾아왔다

[부부가 함께 떠난 규슈 자전거여행기⑪]씁쓸한 니시사토역의 추억

등록 2006.10.25 14:02수정 2006.10.2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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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그때 유우코가 초청한 아소에 가리라고 거의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이런 행운이 어디 있나.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누워 내일 있을 일들을 즐겁게 상상하기도 했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탕에서 나와 기다렸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아내의 얼굴이 왠지 어둡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여자들 틈에 섞여 좀 곤혹스러웠던 모양이다.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유우코의 궁금증은 여전하다.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다. 서울에 두어 번 온 적이 있다는데 생각보다 우리나라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그녀를 탓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나라 일본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나. 바로 이웃나라라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면 서로 껍데기 밖에 모르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


텐트에 돌아와서 아내와 내일 일정을 의논했다. 그녀도 나처럼 당연히 아소에 가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아내의 반대가 자못 완강하다. 여행일정을 지킨다며 그렇게 간절히 애원하던 우츠노미야씨의 청도 물리치고 나와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이곳에서 하루를 낭비하면 어쩌냐는 것이다. 그녀의 반대 명분이다.

느긋하게 여행하려던 처음 계획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표인데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남은 일정에서 하루를 빼면 나머지 계획은 어떻게든 수정해야 한다. 느긋하게 여행하지 못하고 급하게 서둘러야 한다든지. 아니면 차를 타든지.

그래도 그렇지 굴러 들어온 행운을 그렇게 차버릴 필요가 있는가. 계획도 중요하지만 더러는 모든 걸 우연이라는 흐름에 맡기고 따라가 보는 일도 필요한 것이다. 이건 우리 평생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 특별한 경험이라고 설득해도 소용없다. 아내는 당초 일정대로 하자고 막무가내였고 나는 그 막무가내가 섭섭했다.

완강한 아내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아소에 가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유우코의 초청은 돌발사건이었고 이번 자전거여행의 목적을 지키자는 그녀의 논리를 인정했다. 설령 아내를 설득해 아소에 간다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어차피 둘이 함께 가야 할 텐데 거기서 나만 즐겁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국 아소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나 남게 될 것이다.

아내의 반대


별장정문. 왼쪽에 관계자 외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있다는 걸 밖에 나와서야 알았다.
별장정문. 왼쪽에 관계자 외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있다는 걸 밖에 나와서야 알았다.유신준
결론이 난 이상 더 머물 이유가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별장 풍경을 몇장 카메라에 담고 여장을 꾸렸다. 유우코를 만나서 고맙다는 말이나 전하고 가려고 기다려도 안채 쪽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초청에 응하지도 않을 거면서 만나면 또 뭘 하나. 일하는 분에게 유우코에게 전해달라며 명함과 여러 가지 배려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적은 메모를 두고 나왔다.

정문 밖에 나와서 살펴보니 인터폰이 있던 반대편에 관계자 외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허둥지둥 인터폰 벨을 눌렀던 거다. 그렇게 묘한 인연에 잠시 이끌렸던 거다. 무엇에 홀렸던 걸까. 육중한 정문은 이미 닫혀지고 어둠 속에서 영문도 모르고 이루어진 지난밤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오늘도 하늘의 태양은 여전히 쨍쨍하다. 날씨는 왜 이렇게 더운건지. 마음속 한구석에 아소 초청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을 게다. 굴러들어온 행운을 포기하고 떠난다고 생각하니 날씨조차 더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게다. 큰길에 나와서 마침 아침밥을 하는 식당을 발견했다. 서둘러 아침을 대충 때우고 구마모토를 떠났다. 아직도 그놈의 국도 3호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땡볕 속을 한시간 쯤 달렸을까 구마모토를 막 벗어나려는 지점에서 아내 자전거가 갑자기 말썽을 일으켰다. 체인이 자꾸 빠지는 증세다. 비를 맞아서 어디가 고장이 난건가? 서두르느라 뒷 드레일러에 체인을 제대로 끼우지 않고 페달을 밟은 바람에 체인한마디가 완전히 뒤틀어져 버렸다. 손에 시커멓게 기름칠을 해가며 몇 가지를 만져봤지만 도저히 내 힘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주변에는 자전거를 고칠만한 가게도 없고 절망적이다.

두사람 다 화가 났다. 화가나면 일이 틀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불운은 겹쳐온다
두사람 다 화가 났다. 화가나면 일이 틀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불운은 겹쳐온다유신준
아무리 여행 계획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더라도 자전거에 문제가 생긴 이상 모든 여행계획이 전부 무의미해져 버렸다. 우리가 목표에 너무 집착했던 탓일까. 갑자기 허탈해졌다. 다른 일정들을 모두 다 뿌리치고 겨우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쪼그리고 앉아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다른 방법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기차를 타자.

여행이 즐거우면 그만이지 계획대로만 진행되는 여행이 어디 있는가. 자전거에 문제가 생긴 것도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후쿠오카까지 기차로 이동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목표가 없으면 여행에 김이 빠질테지만 목표가 너무 강해도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여행의 위기가 오다

지도를 보니 가까운 곳에 니시사토(西里)라는 역이 있다. 겨우 찾아냈으나 역무원이 없는 무인역이다. 시간표에는 이곳을 지나는 완행전차가 한시간에 서너번 있는 것으로 적혀있다. 근처 제재소 아저씨의 도움으로 역무원이 있는 가까운 역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자 자전거를 그대로 전차에 싣는 것은 안 된단다. 자전거를 분해해서 백에 넣고 얼마의 할증료를 더 내어야만 가능하단다.

니시사토역은 한시간에 완행전차가 서너번 있는 무인역이었다
니시사토역은 한시간에 완행전차가 서너번 있는 무인역이었다유신준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번씩 잡았던 우츠노미야씨네서 좀 더 머물다 올 걸. 총리 딸내미 유우코를 따라 아소에라도 놀러 갈걸. 후회해봤자 모두 지나버린 일이다. 땡볕아래서 땀을 흘리며 분해하느라 시간이 상당히 걸렸고(화가 나서 더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니시사토 역이 육교식 홈이라서 건너편 후쿠오카 방면 승강장에 짐을 옮기는데도 힘이 많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어졌다.

후쿠오카에 도착하니 오후2시가 넘었다. 여러 가지 실망이 겹쳐 점심 생각도 별로 없다. 두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무거운 침묵만 흐르고. 이런 상태로 여행을 계속할 수 없다. 나흘이나 남은 일정을 앞당겨 귀국해 버릴까도 생각했다. 여행일정중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급기야 아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해외까지 나와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다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결국 우리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지난 일은 다 지나가 버린 일이다. 다시 시작하자. 어떻게 잡은 일본여행 계획인데 이렇게 그냥 말 수 있는가. 자전거 수리점을 찾아 자전거를 손보고 늦은 점심을 먹으며 다시 여행계획을 짰다.

아내가 찍어온 비디오를 보면 구마모토를 떠날 즈음부터 그녀의 명랑한 나레이션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 수있다. 여행이 재미없어졌다는 증거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즉석 인터뷰도 하고 장면소개도 하던 그녀의 통통 튀는 목소리가 사라진 채 그냥 화면만 흐른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모르고 그냥 지나치겠지만 우리가 보면 묘한 감정의 흐름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변화다.

문제가 터지는 통에 후쿠오카에서 보내야할 시간이 갑자기 많아졌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여곡절들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여유있는 여행 일정이 확보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기차 안에서 만났던 사람이 섬에 가보라고 조언했던 것이 생각났다.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부담도 안되고 한적하고 좋은 곳이라며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추천해준 곳이다. 늦은 여름휴가니 배를 타고 섬에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섬에 가보기로 했다. 노코노시마(能古の島)라는 후쿠오카 앞바다에 떠 있는 섬이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9월 15일부터 25일까지 떠났던 일본 규슈 자전거 여행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2006년 9월 15일부터 25일까지 떠났던 일본 규슈 자전거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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